하나님은 당연하니 사람이 영광이요 기쁨이
되게하라
살전 2:1-20
10/27/15/화 새벽
1.갈
등
바올의 서신 13개중에 제일먼저 써진 서진이 데살로니가 전서입니다.
그리고 바올서신이 복음서 즉 마태,마가,누가,
요한보다 먼저 써졌습니다. 추정되기로는 AD50-52년 즉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20년이 채안되어 써졌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곧 오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에 ‘내가 올때에 나를 찌른자도 나를 볼것이다”라고 했기에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처음에는3년후에 오실까? 5년후에 오실까? 10년후에
오실까? 그런데 15년이 넘어서기 시작하니까? 박해도 심해지고, 믿던
자들도 핍박을 받아 죽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 승천당시에 베드로가 예수님보다 나이가 더 먹었다면 35이라고
볼때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임을 밝힙니다) 15년이 지나면50이 넘습니다. 옛날 나이 50이면 많이
늙은거지요. 지금도 훈두라스같은 남미나,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필리핀의 외딴섬에가면 50이면 아주 할아버지 입니다.
2.갈등심화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곧 오실줄알고, 집도 팔고, 어떤이는 가족도
버리고, 예수님을 믿고, 전도하고, 목숨을 걸었는데… 예수님은 아직 오시지 않고 있는것입니다. 그때에 바올이 바로 이 [데살로니가 전서]를 처음으로
신약성경중에 처음으르 쓴것입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전서에는 특히 <예수님에 재림>에 대한 내용이 많이 나옵니다. 그날과 그시는 모른다. 쉽게 동요되지말라! 예수님이 오심을
믿는 자들은 오늘을 마지막날처럼 가장 아름답고 성실하게 산다. 그리고 아무리 어려움이 있고,
핍박이 있더라도 주님 다시오심에 대한 소망을 버리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데살로니가 교회에 이 서신을 씁니다. 데살로니가는 [마케도니야] 즉 마케도니아는 알렉산더대왕의 고향인 마케도냐의 행정수도가 바로 데살로니가 였습니다. 이곳은 유럽,아시아,
북아프리카 사람들이 몰려사는 아주 국제적인 도시였습니다.
3.반 전
그런데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사도바올이 데살로가 성도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야손의 집에서 말씀을 가르칠때에 유대인들의 깡패들(불량배)들이 몰아닥쳐서 그들을 핍박했습니다. 사도바올은
이 깡패들을 피하여 ‘베뢰아’를 거쳐서 아테네와 고린도에 이르지만<핍박>가운데 두고온 데살로니가 교인들에 대한 바올은 마음이 애잔합니다.
11절에 “너희도 아는
바와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비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즉 바올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삶의 모습을 보면 늘 마음이 {짠}하다고 {아버지와같이 고백}합니다. 아버지의 심정입니다.
여러분 데살로가 교인과 바올은
실로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였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저는 생각합니다. 바올도 대단하지만 데살로가 교인들도 참 복되다 생각해요.
왜냐하면 바올만 스스로 나는 ‘아버지’이다라고
말하면 아무소용없는데… 데살로니가 교인들도 바올을 대할때에 [아버지 처럼]대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둘 사이의 관계가 늘 사랑이 관계였습니다. 8절 “우리가 이와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함은 너희가 우리 사랑하는 자 됨이니라” 여러분 데살로니가 교인은 바올에게 <사랑하는자>였어요. 저는 오늘날 교회와 목자의 관계가 이와같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4.신학적 잇슈/복음제시 그런데 그렇치 못한 이유가 뭘까 곰곰히 생각해 보면서 오늘 본문을 다시 살펴봅니다. 바로 <고난>이라는 단어입니다.
2절에 <고난> 9절에 <수고> <애씀> 14절에<고난> 1장6절에 “너희는 많은 환난가운데” 즉 예수님때문에~ 복음때문에~ 우리에게는 ‘고난’없다는 것입니다.
<서로 고난이 없고 편하기만을 바라기 때문에> 신앙은 이기적이됩니다.
때로는 목회자도 성도도 그렇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종교개혁을 생각하면서…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칭찬받는 교회, 사랑받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방법’보다는 무엇보다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
<<복음을 위한 수고와 애씀>>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고난속에서 가족과 부부와 친구의 관계가 돈돈히 지듯이… 교회와 성도들간의 관계가,
목회자와 성도들간의 관계가 정말 <찐한 사랑의 관계>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관계가 되어질때에 11절에 서로 <권면encouraging> <위로 comforting> <경계urging>이 가능한것입니다. 이런 래포,즉 관계가 형성되지 않고는 목회자와 교인, 교인들간의 관계에 있어서도 [권면] [위로]
[경계]가 존재할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교회가 잘되기 위해서는, 우리교회가 주의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해서는 {우리 서로가 복음을 위하여, 예수님을 위하여 같이 고난받아야 된다는 것} {같이 수고하고 애써야 된다는 것}입니다.
5. 적용 오늘 말씀을 마칩니다 *그리고 사도바올이 정말 엄청난 고백을 합니다. 19-20절입니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예수님
강림하실때에 나에게 영광이 되어줄 형제와 자매가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오셔서… “너의 영광과 기쁨”은 무엇이냐? 라고 묻는다면 예수님이
나의 영광이요 기쁨이지만 동시에 나에게 기쁨과 영광이 될 형제와 자매가 있어야 합니다. 나는 오늘 오신다면
에덴교회 성도 (구체적으로) 누구누구가 나에게는 영광이요 기쁨입니다
라고 말할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형제와 자매가 있습니까? 찾기를 원하신다면 ‘복음을 위하여 함께
고난받았던 사람’을 찾아보십시요. 없으시면…이런 사람만드시기 바랍니다. 사업과 이익을 위해서 교회나오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위해서 함께 고난받기 위해서 나오실때에’ 나에게 <영광>과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