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된장소 밧모섬
요한계시록 1: 9 -20 | 11 / 2 토
모든 성경중에 제일 중요한 책이 요한계시록입니다. 요한계시록은 [다시오실 우리 주님]이 주인공이십니다. 모든 지나간 것도들도 중요하지만 앞으로 장차되어질일에 대한 감각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이 무엇을 보고 사느냐에 따라서 그 인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장미를 보면서 어떤 사람은 ‘아름다운 꽃’을 보지만 ‘어떤 사람은 날카로운 가시’를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인생이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서 그사람의 [모습]이 보이는 것입니다. (인간의 눈과 가장 닯은 눈을가진 짐승은 사자입니다. 다른것들은 눈이 달라요. 그 이유는 멀리 보기 때문입니다. 광야에서 멀리봅니다. 호랑이도 인간의 눈과는 달라요. 오직 멀리보는 사자만 인간의 눈과 가장 비슷합니다. 뭘보나요?)
그러므로 우리는 현실에 튼튼히 발을 딛고, 예수님 안에서 [미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롯의 아내와 같이 다 구출되서서 또다시 과거를 돌아볼때에 생명이 없는 소금기둥이 된것처럼…미래를 외면하고 과거를 보는 실수를 저질르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울왕과 같이 죽은 사무엘을 다시 불러내는 미련한 짓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사울왕은 그의 자녀와 일가가 완전히 망하는 결과를 초래한 것입니다. è 그래서 요한 계시록은 ‘미래’를 바라보게 하는 건강한 책입니다.
3절에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또한 이 요한계시록은 우리의 신앙을 점검할수 있는 좋은 책입니다. 많은 분들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심판’ ‘전쟁’ ‘파멸’ ‘유황불’ ‘이상한 바다괴물’ ‘청황색말’ ‘우뢰와 천둥’ 등등을 보면서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즉 [심판을 두려워합니다] è 만약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한다면 문제가 있는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 요한계시록 같은 말씀앞에서 두려워하는 자는 ‘지옥갈 확률이 높습니다’
요한 계시록의 1차 독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지금부터 2000년전 로마시대, 네로의 잔인한 박해속에 있던 기독교인들에게 보내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들은 하루라도 빨리 주님이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라나타신아) / 아멘 주예수여 어소 오시옵소서. Amen. Come, Lord Jesus. / (현대인) 아멘. 주 예수님, 어서 오십시오. //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 백성의 구원과 같은 말입니다. 구약에서 왜 하나님을 사람을 죽이냐? 이말은 자기백성을 죽을것에 살렸다는 것임
많은 사람들은 요한계시록하면 ‘최후의 종말’ ‘둠스데이’ ‘인류멸망’ 등등의 말을 표현합니다. 그래서 실제로 보면 요한계시록안에는 무서운 환상과, 피, 물, 불, 마귀등등이, 사자, 이상한 괴물등등이 출현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에 대한 공포는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것이고…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요한 계시록]은 <복>입니다. 오늘 3절에서도 예언의 말씀을 일고,듣고,지키는 자에게 [복]이 있다. 즉 그 기록목적은 [겁을 주기위함이 아니라] [복을 주시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먼저 말씀하십니다. 작은 단어입니다만 우리가 이것을 발견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이 관점에서 한번 요한 계시록을 볼수 있습니다.
밧모섬(Potmos) – 에베소에서 남서쪽으로 90km지검에 위치한, 에게해의 작은 불모지 섬입니다. 요한이 AD95년경 이곳으로 유배당했습니다.
밧모섬은 [갇혀있음][고난에 동참]이란 뜻과도 일치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어떤상황속에서 받습니까? 소풍가서, 여행가서, 놀다가 받는것 보다는 이처럼 <밧모섬>에서 사도바올은 <로마감옥에서> 받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할 시간이 없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할 시간이 더 많다는 것이다. 광야에서 말씀을 받습니다. 밧모섬에서 받습니다. 여러분의 인생가운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어려울때 가장 말씀과 가까이 있는것 입니다.
자기를 제한할 때, 보다 가까이 그리고 깊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것 입니다. 특히 요한이 이와 같은 계시를 받은날은 다른날이 아닌<주의 날>입니다. The Lord’s Day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일성수’를 못하는 것은 엄청난 인생의 손해입니다. 주의날을 지키지 못한다는 것은 ‘거의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고 보아도 됩니다. è “주일날 성령에 감동되어”라고 했습니다. 주일예배를 드릴때에 감동이 없으면 다른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일날을 말씀을 받는날, 복을 받는 날 입니다.
12절에 보니 ‘요한이 주의 음성을 듣고’ – “몸을 돌이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은 어떤식으로든 반응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요. 여러분 말씀듣고 반응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돌아보았을때에 요한이 본것은 “인자 같은이 였습니다” 인자라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즉 여기서도 알수있는 것은 요한은 자기에게 보여주시는 것만 보는 것입니다. 즉 보이는 만큼만 기록했습니다. 자신의 감정과 생각과 의견을 슬쩍 첨가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받는것입니다.
여러분 구약성경중에 예언서들이 있습니다. 이사야, 예례미야, 다니엘, 에스겔, 미가, 나훔,학개, 스가랴, 말라기 등등을 우리는 예언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히브리말로 ‘나비’라는 이 예언자의 뜻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예언자할때 “예”자를 한자로 “미리 예”자로 착각합니다. 아닙니다. “맡길 예” 자입니다. 그래서 “에언자”란 하나님의 말씀을 미리 이야기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자 입니다. 즉 오늘 이 계시록도 요한이 미리 보고 말한다기 보다는 ‘주님이 보여주시는 말씀 만큼만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것 하나있습니다. 요한은 “인자 같은 이” 라고 했지만 우리는 그분이 “인자, 즉 사람의 아들, 예수님”인 것을 압니다. 그것을 쓴사람도 알고, 그것을 읽는사람도 압니다. 이것이 신비입니다. 귀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콩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것입니다.
13-16절에 묘사되어 있는 <인자같은 이> 즉 예수님의 모습은 ‘승리자의 모습’입니다. ‘통치자의 모습’입니다. 이 모습을 보고 모든 사람들이 안심을 하는것입니다. 자신들이 겪고 지금이 박해상황이지만 반드시 이 싸움이 승리할것을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 18절에 보니 ‘지옥의 열쇠’ 까지도 예수님이 가지고 계십니다. 즉 곧 얼마안되어 심판이 이루어 지고 지옥에, 감옥에 사단과를 그를 따르는 자들을 가둘것이라는 메시지 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C.S 루이스는 종말론의 이 놀라운 ‘현실성’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천국대신 지상을 선택한 사람은 지상이 처음부터 지옥의 한구석이었음을 알게될것이다. 또 지상을 천국 다음 자리에 놓은 사람은 지상이 애초부터 천국의 일부였음을 알게될것이다”
사람은 무엇을 욕망하느냐에 따라서 눈앞에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태도와 생각이 달라집니다. 천국에 갈망을 맞춘 사람은 현실에서도 천국을 살아갈수 있습니다.
오늘 사도요한 밧모섬에 유배되었지만, 거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주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곳이 가장 복된 장소가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주의 음성듣고 반응하여 복된자의 삶을 살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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